[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최상의 정책은 어느 정권에서도 만들 수 없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다양한 의견이 있어, 게 중에서 최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최선의 정책은 만들 수 있다. 구체적 정책을 내놓기 전에 다양한 의견을 듣고 간담회, 공청회 등을 거쳐 여러 의견을 수렴한 뒤 만든 정책은 최상은 아니더라도 최선은 될 수 있다.”
최근 일련의 윤석열정부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정책과 예산을 두고 한 과기계 인사가 한 말이다. 윤석열정부가 내놓는 R&D 정책을 보면 여러 견제 장치가 사라지면서 ‘눈먼 돈’이 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지적을 내놓았다.
여러 의견을 듣고 만드는 ‘절차적, 수렴적 정책’을 만들기보다는 지시에 따른 ‘명령적, 일방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거다. 윤석열정부는 올해 R&D 예산을 2023년보다 대폭 삭감했다. 그 이유로 들이댄 게 구체적 실체가 없는 ‘R&D 카르텔’이었다.
실체도 없는 ‘R&D 카르텔’이란 키워드를 꺼내 들면서 올해 관련 예산을 지난해보다 약 14% 줄였다. ‘나눠먹기’ ‘비효율’이란 이유도 들이댔다.
어떤 곳에서 나눠먹기가 있었는지, 비효율은 구체적으로 어떤 곳에서 발생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나눠먹기’ ‘비효율’이란 키워드로 올해 R&D 예산을 대폭 삭감하더니 내년 예산은 다시 2023년 수준으로 회복시켰다.
또 다른 과기계 인사는 “올해 예산을 대폭 삭감하더니 내년 예산은 다시 2023년 수준으로 회복시켰다”며 “1년도 채 안 된 시간에 ‘나눠먹기’ ‘비효율’을 모두 거둬냈다는 건지, 또 ‘R&D 카르텔’이 사라졌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과기정통부는 내년도 예산을 2023년 수준으로 회복시키면서 두 가지 주요 정책을 내놓았다. 하나는 과학기술 R&D에 대해서는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를 폐지하겠다는 것.
두 번째는 혁신‧도전형 R&D는 ‘우수‧보통‧미흡’이란 결과적 평가를 하지 않고 과정에서 컨설팅하는 시스템으로 바꾸겠다는 게 핵심이다. 한 마디로 혁신‧도전형 R&D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겠다는 거다.
예타는 그동안 심사 시간이 오래 걸려 문제점으로 지적된 바 있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기술계에 걸림돌이란 의견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다만 국민의 세금(약 1000억원 규모)이 많이 투입되는 만큼 사전에 해당 사업을 추진하는 게 타당한 것인지는 살펴봐야 한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이런 예타를 폐지하겠다는 게 과기정통부의 정책이다. 문제는 예타 폐지를 들고나오면서 여러 관계자의 의견이나 간담회, 공청회 등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부분이다. 예타를 폐지하면서 보완책은 어떻게 할 것인지도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은 이를 두고 “R&D 예타에 관한 주요한 논의가 공개되지 않고, 몇몇 행정관료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지적한 바 있다. 대통령이 지시하고 관련 부처가 이 지시를 그대로 따라 만든 정책이란 비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타가 폐지되면 최고 권력자 혹은 부처의 장·차관이나 힘 있는 실·국장의 희망 사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몇 백억원에서 몇천억원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사업이 거침없이 추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민의 세금이 대거 투입되는 사업이 ‘눈먼 돈’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는 우려다.
이와 관련해 임요업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조정관은 “올해 5~8월까지 (예타 폐지와 관련해) 관련 간담회, 출연연 관계자와 대화 등 여러 의견을 수렴했다”며 “그동안 예타는 심사 기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 절차 등 급변하는 과학기술계 현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예타가 지금 당장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관련 법률이 개정돼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재정법의 개정과 과학기술기본법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다.
임 조정관은 “예타 폐지와 관련된 법적 조항에 대한 개정을 올해 연말까지 정부안으로 준비할 계획”이라며 “내년에 국회에서 통과되면 2026년부터 예타 폐지가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타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이른바 예타에 ‘패스트트랙’을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 조정관은 “그동안 예타는 ‘GO(가느냐), NO GO(중단하느냐)’의 이분법적 제도였다”며 “예타가 갖고 있던 여러 단점을 보완하고 개선해 왔는데 궁극적으로 예타를 폐지하는 게 가장 최선의 정책 방향성이란 판단을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 조정관은 “(예타 폐지에 따른 보완점으로)기술 분야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사전 기획 점검제, 맞춤형 검증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라며 “도입 과정에서 관계 부처는 물론 현장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세부 추진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해명했다.
윤석열정부가 R&D 정책에서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혁신‧도전형, 글로벌 R&D에 대한 시스템도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본부장 류광준)는 실패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 고난이도 목표를 지향하는 혁신·도전형 R&D 사업에 대해서는 결과주의적 평가 등급을 폐지하고 과정 중심의 정성평가로 전환한다고 지난 22일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정책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역시 그동안의 평가 시스템은 어땠는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장단점을 자세히 따져보기 이전에 정부가 정책을 만들어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임 조정관은 “고위험, 고난이도의 (혁신‧도전형 R&D) 연구과제에 적합한 평가의 틀을 제시함으로써 연구자의 도전성을 고취하고 국가 R&D 체질을 선도형으로 개선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평가시스템을 보면 평가위원들이 점수를 매기는 부분과 의견을 적는 부분이 있었는데 대부분 점수만 매기고 의견 부분은 짧게 적는 게 관행이었다”며 “앞으로 혁신, 도전형 R&D에서는 점수를 매기는 것 보다 평가위원들이 다양한 의견을 좀 더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관련 연구를 보완, 수정하는 시스템으로 바꿔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종오 기자(ikokid@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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