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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율의 포스트홀릭] 만년 후에도


만년 후에도

글을 쓴다고 하면 으레 선물로 만년필을 준다. 고맙고 다시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내 손에 들어온 만년필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괜히 심술이 난다. 요즘 펜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다른 걸로 주라고 말할 수도 없고 참으로 그렇다. 결재 사인이나 하는 CEO라면 만년필이 폼도 나고 유용하게 쓰일 진 모르겠으나 자판이나 두드리는 내 일상과는 사실 거리가 멀다. 나무필통에 하나의 만년필이 추가되었다. 만년필들끼리 비스듬히 기댄 채 나른한 오후를 보낸다.

마루에서 늘어지게 오수를 즐긴 후, 어정쩡한 자세로 앉은뱅이의자에 앉는다. 꿈에서 본 신비로운 장면, 그것이 달아나기 전에 잡아둘 요량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아, 다행히 생각을 글로 변환하는데 성공.
그러고 보면 생각과 글 사이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좁히는 사람은 작가의 삶을 살고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는 사람은 독서로 대신한다.

어김없이 저녁이 오고 라임향이 시간 속에 흐른다. 형광등 불빛에 만년필 대머리가 반짝인다. 만년필과 모니터에 떠 있는 글들을 번갈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나의 글도 만년필처럼 오래 가야 할 텐데. 만년필을 보고 다시 내 글들을 본다. 오늘 따라 더 진심을 담아 글을 쓴다. 만년 후에도 살아남아야 한다. 만년필 너도, 그리고 나도, 내 글도 사랑도.

김이율(dioniso1@hanmail.net)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짓말」, 「가슴이 시키는 일」 등의 베스트셀러를 펴냈으며 현재는 <김이율 작가의 책쓰기 드림스쿨>에서 책을 펴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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