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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윤의 글로벌 테크놀로지 아웃룩]메이드 인 글로브 시대


지구촌이 함께 개발하는 협업R&D의 시대 온다

스위스 롤렉스 오메가 시계, 독일 벤츠 BMW 자동차, 일본 소니 TV, 워크맨과 니콘 캐논 카메라, 그리고 미국 IBM과 애플의 컴퓨터.

필자의 한창 젊은 시절이었던 지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처럼 첨단 기술이 집약된 제품들은 특정 국가의 특정 기업들이 ‘꽉 잡고 있던’ 시대였다. 이런 ‘명품’들이 워낙 비싼 가격 때문에 놓친 시장을 겨냥해 우리 기업들도 각고의 노력으로 여러 제품들을 생산하고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적지 않은 시장을 확보하는 성공을 거뒀을 망정, 이들 명품들과의 뚜렷한 품질의 격차에 대해서는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조의 글로벌화 – IT 제품 무국적 시대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은 대한민국 IT산업의 발전상을 체감함과 동시에 이제 주변의 웬만한 IT제품의 국적을 따지는 것이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음을 깨달아가고 있다. 책상 위의 PC를 한 번 생각해보라. 삼성, LG, 삼보 브랜드이기 쉽고, 소니, 레노버, 델 노트북일 수도 있겠다.

‘메이드 인’ 표시 기준으로는 국산일 가능성이 높고, 중국, 일본, 대만이나 동남아 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운영체제(OS)를 탑재했을 것이고, 십중팔구는 인텔 CPU와 삼성전자•하이닉스 메모리를 대만 어느 기업의 주기판에 꽂아 넣은 제품일 것이다. 모니터는 삼성전자나 LG디스플레이의 LCD패널 기반일 것이다. 당연히 제품 자체의 국적이나 브랜드에 따른 품질의 차이는 그야말로 미미한 수준일 수 밖에 없다.

PC뿐 아니다. 소니 LCD TV에 들어간 핵심 LCD 패널은 아마도 삼성전자와의 합작벤처 S-LCD의 우리나라 생산라인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진짜 국산’일 법 한 주머니 속 휴대폰에도 미국 퀄컴의 CDMA 칩이 들어있다는 스티커가 붙어있을 것이며, 그 안에는 일본 야마하의 벨소리 음원칩도 탑재하고 있을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만약 당신이 르노삼성 차량을 갖고 있다면, 동일한 모델이 일본 닛산 브랜드로는 어떤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뿐 아니라 닛산 차와 동일한 부품이 상당수 사용됐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데 걸고 싶다.

명실공히 글로벌 무한경쟁의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웬만한 IT제품들은 이처럼 브랜드의 국적만이 상징적으로 남아있을 뿐, 사실상 제조국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메이드 인 글로브(Made in Globe)’ 제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전세계의 IT 기업들이 제품 제조과정을 글로벌 차원에서 최적화함에 따라, 즉 수많은 부품들은 물론, 제조인력까지 전세계 각지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찾아 공급받게 되면서 생겨난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덕분에 우리는 옛날 품질을 생각해 비싼 값을 주고 일제 가전제품을 사던 시절에서 벗어나, 인터넷을 통해 조금만 품을 팔아도 탄탄한 성능을 갖춘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기업의 측면에서는 제품의 최종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PC의 OS나 CPU, TV의 LCD패널, 휴대폰 모뎀칩, 그리고 디자인 등 핵심적인 기술, 부품, 부가가치의 주도권 확보가 중요성을 갖게 됐다.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글로벌화 트렌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더욱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기업 경영의 모든 요소들을 글로벌 차원에서 최적화하는 글로벌통합기업(GIE; Globally Integrated Enterprise) 모델의 도입은 이러한 글로벌 트렌드의 한 축으로, IBM의 주도로 전세계에 전파되고 있다. 특히 이같은 글로벌화 추세는 이미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수준과 맞물려, 향후 미래 핵심 기술 및 제품의 R&D(연구개발) 영역에서 전세계 각국의 여러 기업들이 함께 협력하는 ‘Collaboration R&D(협업 연구개발)’의 본격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Collaboration R&D의 시대가 온다

첨단 IT산업의 핵심인 반도체산업에서는 이미 이와 같은 Collaboration R&D의 굵직한 사례가 가시화되고 있다. IBM은 삼성전자와 차터드세미컨덕터(싱가포르 파운드리 기업)를 비롯한 세계 유수 반도체 기업들과 함께 ‘커먼플랫폼(Common Platform)’ 컨소시엄을 결성, 차세대 반도체 칩의 설계 및 제조공정 기술 확보는 물론, 실제 칩 생산에 이르는 포괄적인 부문의 Collaboration R&D를 진행해가고 있다.

커먼플랫폼 컨소시엄은 ▲IBM이 보유하고 있는 칩 설계, 기술 개발, 시스템 설계 및 연구부문의 전문성과, ▲삼성전자의 나노 미세 공정 기술, 소비자 제품 전문성과 저전력 기술 및 규모의 경제, 그리고 차터드, 소니, 도시바, AMD, 인피니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프리스케일, ARM 등 내로라 하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역량을 한 데 모아, 32나노, 28나노 반도체 생산공정의 Collaboration R&D를 통해 유연한 반도체 설계 및 제조환경을 구현한다는 계획이다. 커먼플랫폼 컨소시엄은 이 같은 협업을 통해 향후 차세대 반도체 제조산업을 주도해갈 수 있을 것으로 크게 기대를 모으고 있다.

커먼플랫폼 컨소시엄의 영향력은 회원사들의 반도체사업(D램 메모리 부문 제외) 총 자본투자(CAPEX) 규모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332억 달러로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인텔(같은 기간 191억 달러)을 훨씬 뛰어넘은 것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커먼플랫폼 컨소시엄은 반도체 칩의 회로를 점점 더 얇게 축소하는 방법으로 ‘무어의 법칙’으로 불리는 급속한 성능 향상을 이뤄온 반도체업계가, 최근 수십 나노급 공정에 들어서 물리법칙의 벽에 부딪치면서 성능 향상을 이어가기 위해 천문학적인 연구개발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스마트하게 공동 대응하는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막대한 연구개발투자의 분담 필요성과 함께, 기술 표준화와 관련된 리스크 최소화의 요구 또한 첨단 기술 기업들을 Collaboration R&D로 몰고 갈 주요 동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IT기업들은 과거 VHS 대 베타맥스의 VCR 표준경쟁사례를 통해 분명히 확인된 승자독식 표준경쟁에서의 패배 리스크를 최소화하고자, 표준 주도기업은 수많은 기업들과 연합을 통해 세를 불리고, 참여 기업들은 한 편에 ‘올인’ 하기보다는 ‘양다리’를 걸치거나 최소한 다른 편에 ‘보험’을 드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블루레이와 HD-DVD의 차세대 DVD 표준경쟁이 바로 이런 양상을 보여왔고, 한창 달아오르고 있는 모바일 와이맥스 대 LTE(Long Term Evolution)의 4G 모바일 통신 표준경쟁 또한 승자독식을 위한 무한경쟁보다는 상호 공존 번영을 위한 주요 기업들의 연구개발 및 표준화 협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보다 높게 점쳐지고 있다.

Collaboration R&D의 또다른 방향은 바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영역에서 드러나고 있다. 오픈소스 진영이 IBM의 주도하에 자바 기반으로 선보인 ‘이클립스(Eclipse)’ 플랫폼은, 막강한 기능에 더해 전통적인 오픈소스 환경을 추구할뿐 아니라, 상용 소프트웨어 개발과 자유로운 라이선스도 허용하는 유연한 개발환경을 제공한다.

이클립스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비영리기관 이클립스재단이 관리하는 대규모 오픈소스 개발자 커뮤니티로 발전해오고 있다. IBM은 최근 이클립스 기술에 기반해 세계 각지의 개발팀원들에게 실시간 협업을 지원함은 물론 협력사와 고객사에도 개발 프로세스를 투명하게 공개해 즉각적인 피드백을 가능케 해주는 ‘재즈 플랫폼’과 그 첫 상용제품 ‘래쇼날 팀 콘서트’를 발표,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글로벌 차원의 Collaboration R&D를 접목하기 시작했다.

SaaS(Software as a Service) 비즈니스 모델의 선구자로 꼽히는 세일즈포스닷컴이 자체 애플리케이션의 일부 소스를 공개함으로써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소프트웨어 개발 참여를 유도, 이를 소프트웨어 유통의 모델로까지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것 또한 Collaboration R&D의 추세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급성장하고 있는 SaaS 영역에서 이같은 개발모델의 확산을 예고하고 있다.

‘메이드 인 글로브’의 심장에 우리 기술을

이처럼, 기업과 시장의 글로벌화는 개별 제품들의 국적의 의미를 없앤 데 이어 앞으로는 미래 핵심기술과 제품의 연구개발도 세계 각국 기업들이 힘을 합치는 Collaboration R&D를 통해 ‘메이드 인 글로브’로 등장하게 할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커먼플랫폼 컨소시엄의 한 핵심을 담당하고 있듯이, 앞으로 글로벌화의 전개와 함께 펼쳐질 Collaboration R&D의 시대에 우리 기업들도 당당히 유수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협력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모든 ‘메이드 인 글로브’ IT제품들의 심장에 우리 기업, 우리 연구원들의 기술이 빠짐없이 깃드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강윤 한국IBM 연구소 소장 column_key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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