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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김영달 아이디스 사장


 

안녕하세요,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코너입니다. 다산네트웍스 남민우 사장의 18년에 걸친 다아내믹한 사업이야기에 이어 115번째 릴레이인터뷰는 세계적 DVR업체로 도약한 아이디스 김영달 사장입니다.

"김영달 사장은 벤처기업을 창업,글로벌기업으로 일군 국내 몇안되는 성공 벤처기업가입니다. DVR 초창기 업체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아이디스의 해외진출기는 대표적 벤처기업 성공모델입니다."

아이디스 김영달(39)사장이 어떤 뛰어난 경영수완을 발휘해 아이디스를 세계 1위 기업으로 키워냈는지, 그의 10년에 걸친 벤처사업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국내 대표적 디지털비디오레코더(DVR)업체 아이디스가 창업 10년만에 세계적인 글로벌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DVR 시장 1위 기업으로 등극, 화제다.

DVR이란 기존 감시카메라 CCTV를 디지털화한 보안감시장치. 기존 CCTV의 경우 감시동영상을 테이프에 녹화하는 아날로그방식인 탓에, 화질이 떨어지고, 테이프를 수시로 교체해야 하고, 특정 동영상을 찾기 위해서는 테이프 전체를 뒤져야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DVR은 PC처럼 저장장치를 통해 화상을 디지털로 저장, 선명한 화질을 제공하고, 검색,복원기능은 물론, 네트워크로 원격검색이 가능한 디지털개념의 감시장비.

삼성동 김 사장 집무실 한켠에는 1천만달러부터 시작해 5천만달러까지 천만달러단위로 수출의 날에 수상한 '수출의 탑'트로피들이 죽 진열돼 있다.한눈에도 수출로 먹고사는 회사라는 걸 알수 있다.

아이디스는 DVR을 세계 최초로 개발, 국내는 물론 세계 30여개국에 판매하며 DVR에 관한한 세계 최고수준의 글로벌기업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기술벤처회사다.

김 사장은 지금도 '사업할 사람같지 않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실제 그는 전형적인 학자풍의 모습이다. 워낙 표정이 해맑은 탓에 고생모르고 평탄하게 살았을 것같은 느낌을 준다.

통상 CEO 10년차정도 되면, 산전수전 온갖 풍상을 다겪은 역사가 묻어나건만, 김 사장은 여전히 대학캠퍼스 강단의 교수같은 온화한 분위기다.

그는 매우 부드럽고, 상대방을 매우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다. 강한 카리스마보다는 유연하고, 치밀한 전략가형 CEO다. 꾸밈없는 외모와 화려하지 않지만 설득력있는 대화법이 눈길을 끈다.

김 사장의 창업기가 최근들어 새삼 재평가받고 있는 것은 국내 벤처기업으로는 보기 드물게 '우물안 기업'이 아닌 세계 보안시장의 절대강자로 등극,글로벌기업으로 우뚝서는데 성공했기 때문.

비즈니스모델을 찾아내고, 사업화하고, 생존을 위한 끝없는 모험과 시도, 세계 시장진입을 위한 대결단 등 김영달의 10년간 사업역정은 벤처기업 성공확률 1%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떤 고민을 해야하는지를 치열하게 보여준다.

아이디스는 97년 설립된 DVR 전문업체. 미 하니웰, 타이코, 리차드슨, 파콤 등 세계적 파트너사를 통해 세계 30여개 국가에 DVR를 수출, 연매출 750억~800억원대, 연평균 30%대의 높은 영업이익율을 기록하고 있는 국내 대표적 유망 벤처기업이다.

◆ 무모한 29살의 청년

"비디오테이프로는 12시간밖에 녹화할수 없을텐데….필요한 화면을 찾을 때 저 많은 수십개의 테이프를 언제 다 틀어 확인하지?"

97년봄, KAIST 박사과정중이던 김영달. 건물에 들어서던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경비실 한구석에 수북히 쌓여있는 수십개의 CCTV 녹화 비디오테이프.

어느날 "PC에 저장할수 있으면 테이프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텐데, 녹화화면을 검색하고 재생할수 있으면 테이프를 저렇게 쌓아둘 필요가 없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

김영달이 사업가의 길로 접어든 것은 KAIST 지도교수였던 이광형 교수의 제안이 결정적이었다. 이 교수는 그에게 한국에서만 공부하면 시야가 좁아지니, 실리콘밸리에서 연구원으로 1년간 갔다오라 제안한다.

95년 여름, 실리콘밸리로 날라갔다. 교수를 꿈꾸던 그에게 실리콘밸리의 역동성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애플과 시스코 같은 회사를 옆에서 지켜보며 그는 실리콘밸리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작지만 강한 기업들이 몇 년만에 수천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글로벌기업으로 급성장하는 것을 보고,그는 자연스럽게 '누구나 창업을 할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는다.

96년 봄, 귀국과 동시에 창업을 결심한다. 이때부터 그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된다. 사람부터 모았다. 박사과정이던 동료 2명을 끌어들였다. 사업아이템은 없었다.

놀라운 것은 사업아이템을 찾아내는 그의 접근방식. 그가 정한 원칙은 리스크가 적고, 새로운 기술혁신을 통해 시장을 재편할수 있는 분야라야 한다는 것.

즉 없는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 아예 도전조차 포기한 것. 대신 시장이 이미 존재하는 분야에서 새로운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 시장을 재편해 생존하겠다는 '1위 따라잡기'전략을 택했다.

놀라운 발상이 아닐수 없었다. 너도나도 뛰어들었던 게임과 인터넷, 무선통신분야에는 눈길조차주지 않았다. 아무리 앞선 최첨단 기술이라도 시장이 형성되지 않을수도 있다는 그의 맥점짚기는 놀라운 감각이 아닐수 없었다.

이와함께 IBM같은 세계적인 회사들이 주력으로 하지않는 시장이어야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글로벌 메이저기업이 주도하는 시장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그런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죠"

1년간 사업아이템을 준비한 그의 치밀함은 아이디스의 성공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수북히 쌓여있는 CCTV 녹화 비디오테이프를 눈여겨본 김영달이 내린 결론은 '보안'이었다.

시중에 나와있는 보안장비란 장비는 다 뒤져 확인했다. 관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이미 존재하는 오프라인 보안시장에 혁신적인 최첨단 디지털기술을 개발, 뛰어들면 승산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초창기 검토하다 포기한 화상회의시스템 시장은 이후 수백개 업체가 뛰어들었지만, 결국 시장은 열리지도 못한채 사그라들고 말았다.

김영달은 사회 경험없이 29살의 나이에 무작정 사업에 뛰어든 무모한 청년이었지만, 그는 이미 놀라운 사업가적 기질을 갖춘, 결코 무모하지 않은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그의 학문적 천재성은 비즈니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 달콤한 유혹,그리고 선택

"그 정도 기술은 식은죽 먹기지. 100% 성공할수 있어."

97년 9월초,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김영달은 수없이 혼잣말을 되내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뉴욕에서 열린 ISC 시큐리티쇼를 관람한 후 김영달은 DVR사업 성공을 100% 확신했다. 그는 특히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미 샌소매틱사가 박사급 수십여명을 투입, 6개월넘게 매달려 개발했다는 DVR 신제품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허접하기 이를데 없었기 때문. 이미 디지털이미지를 다루는 기술에 관한한 전문가수준이었던 그의 눈에 샌소매틱 제품은 평범함 그 자체였다. 흥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귀국하자마자 창업에 나섰다. 9월말 자본금 5천만원으로 '지능형 디지털통합시스템'의 영문이니셜인 '아이디스'를 설립했다. 그 때 그의 나이 29살. 창업자금 5천만원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마련했다.

그는 이미 과기대 학부시절부터 방학때 ETRI, 표준연구원 등에 알바를 해 돈을 짭짤하게 벌고 있었다. 그런 ETRI 인턴경력때문에 개발용역은 꾸준히 이어졌다.

10기가 전송망이나 휴대폰용 SW개발, 퀄컴칩 테스트용 디버깅보드, 테스팅툴 SW 등 최첨단 SW를 수도없이 용역개발했다. 1천만원도 받고, 3천만원도 받았다.

덕분에 학생신분이었지만, 주위에 손벌리지 않고 회사를 설립할수 있었다.설립후 1년간 DVR 개발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개발용역이 고민이었다. 계속 주문이 들어왔기 때문. 5억원, 10억원, 나중엔 20억원짜리 개발용역도 들어왔다.

당시 20억원은 엄청난 거금. 하지만 20억원을 벌려면 멤버전원이 3년간 다른 일하지 않고 여기에만 매달려야 했다. 김영달은 매출하나 없는 상태지만, 20억원을 과감히 포기한다.

"개발용역은 마약과 같습니다. 한번 맛들이면 쉽게 못끊죠. 딱 짤랐죠. 그 이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DVR개발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개발용역은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하지만 김영달은 몇 년간 회사운영자금을 확보할수 있는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3명의 KISAT 천재, 그들만의 신화를 만들다

"형, 성능이 나왔어, 성공했어."

98년 6월, 세명의 천재들은 서로를 부둥커안고,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창업후 정확히 10개월후인 98년 6월, 세명의 천재들은 보안시장에 일대혁명을 일으킬만한 엄청난 제품을 내놓는다.

바로 아이디스의 첫 제품 'IDR-1016'모델을 출시한 것.디지털방식의 DVR은 이렇게 탄생한다. 제품은 단숨에 업계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기존 제품과는 비교할수 없는 엄청난 성능의 디지털제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기 때문.

카메라 16대의 아날로그영상을 디지털로 변환, 하드에 저장하는 것은 물론,검색 및 복원이 가능하고, 네트워크를 통한 원격검색기능을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성능을 선보인 것. 카메라만 빼고 모든 것을 디지털화한 것.

이들이 개발한 DVR은 국내 보안시장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며 신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마침 전자신문에 대서특필된후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은 물론, CCTV업체, 전국 보안장비대리점 등에서 문의가 쇄도했다. 독점공급, 판권을 달라 난리가 났다.

이에 앞서 96년 정부에서 농협, 우체국 보안장비를 디지털화하라는 방침에 따라 정부기관 CCTV를 디지털로 교체하는 시기였다. 문제는 디지털제품들이 공공기관에 납품되고 있었는데, 무늬만 디지털이지, 성능은 아날로그보다도 못했던 것.

1초에 4장씩 찍는 수준이었다. 1초에 4장의 화면으로는 사고발생시 1초간의 상황을 분간하는게 불가능했다. 누군가 칩입, 0.2초만에 잠입하면 화면에 잡히지 않는 것.

반면 아이디스의 신제품은 1초에 16장 찍는 수준. 여기에 모션디텍션기능을 제공, 움직임이 있을때만 자동녹화가 되는가 하면, 원격으로 검색까지 제공한 것. 아이디스 제품은 내놓자마자 DVR제품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이 때부터 새로운 고민을 시작한다. 바로 영업이었다. "영업과 마케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직원이라야 개발자 10명, 영업인력은 한명도 없던 상황. 장고끝에 대리점체제를 갖춘 직접 영업은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벤처기업이 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제품을 파는 것은 인적, 시간적 낭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고 개발만 하고, 마케팅, 관리, 생산을 모두 대기업에 맡기는 종속적인 형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PC로치면 브랜드를 가진 용산전자상가의 조립PC형태로 가는게 아니라,삼성전자의 고급형 PC로 가되, ODM방식으로 판로를 확보한다는 것. 하지만 삼성항공, 삼성테크윈 등 대기업들은 한결같이 독점공급을 요구했다.

연간 수십억원의 안정적인 매출을 보장한다는 대기업의 제안은 구미 당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No'였다. 98년 10월, 에스원(구 세콤)과 에스원 경쟁업체에는 공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공급계약을 맺었다.

일반 유통시장은 삼성전자, 금융권 등 SI시장은 콤텍시스템 등 분야별 1위 업체와만 손잡았다. 국내 시장은 단숨에 파트너 3사를 통해 판로문제가 해결됐다. 제품이 단연 최고였기 때문에 가능한 제휴였다. 이로써 김 사장은 국내 시장에 대한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될수 있었다.

98년말 신한은행입찰에선 에스원, 콤텍 등 파트너 2개사가 1,2위를 차지할 정도로 아이디스제품은 최고의 제품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2년여만에 금융권 프로젝트의 80%를 아이디스가 차지했다.

98년 3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99년 30억원으로 늘었다. 김영달은 99년부터 해외시장에 전력투구한다. 그는 해외시장에서도 놀라운 마케팅능력을 과시하며 또한번 업계를 놀라게 한다.

김영달, 그는 누구인가?
68년 대구생. 과기대 전산학과(87학번)석사,KISAT박사출신.높은 기술적 이해도를 갖춘 보안시스템 전문가.치밀하고 뛰어난 기획력의 소유자.온화한 성격에 친화력이 좋아 IT산업계에 폭넓은 네트워크를 자랑한다.화려하게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스타일.벤처기업협회 부회장.디지털CCTV협의회 회장.
취 미스키 골프(핸디 14)
감명깊게 읽은 책 Good to Great(위대한 기업을 넘어,좋은 기업으로.짐콜린스 著),1분경영(텐블랜차드 著)
존경하는 CEO유한양행 창업자인 故 유일한 박사(철학있는 기업을 일군 CEO다) 친한 IT맨 김정주 넥슨 사장,남민우 다산네트워크 사장,박성찬 다날 사장,양덕준 레인콤 사장,송혜자 우앗닷컴 사장
10년후 모습기업가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 운명적인 만남, "하이트론시스템즈 사랑해요"

"저에게 전권을 주신다면, 저는 대전에 있는 신생벤처회사, 아이디스를 택하겠습니다."

담당부장의 이 말한마디에 아날로그 CCTV 수출전문기업 하이트론시스템즈의 최용덕 사장은 즉시 아이디스와의 미팅을 지시한다.

아이디스는 하이트론 담당부장의 보고 한마디에 큰 행운을 잡는다. 담당부장이 이런 보고를 한 연유는 지난 3년간 수없이 많은 DVR업체를 물색했지만, 하이트론이 15년간 필드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다 녹여서 개발한 DVR은 아이디스 제품이 세계에서 유일했기 때문이다.

98년 8월, 김 사장은 하이트론 최 사장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15년간 아날로그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누비던 하이트론은 디지털제품이 없어 쩔쩔매던 상황이었고, 아이디스는 네트워크가 없어 해외수출은 엄두도 못내고 있던 차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하이트론은 아이디스에 투자, 피를 섞는다. 이미 15년간 CCTV를 수출해온 하이트론은 전세계 어떤 DVR업체와도 손을 잡을수 있는 글로벌기업이었다. 하이트론은 아이디스의 기술력에 매료됐다.

그에겐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보안시장은 좀처럼 제품교체를 하지않는 특성을 갖고있어 시장진입이 매우 힘든 분야중 하나다. 때문에 아이디스같은 신생회사가 단독으로 해외시장을 공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니웰, 타이코그룹 등 세계적 기업들이 보안시장 유통망을 잡고있어 여기에 끼어들지 않고는 시장에 진입조차할수 없기 때문. 하이트론과 손잡으면서 아이디스는 화려하게 해외무대에 데뷔한다.

해외수출 15년 경력의 하이트론 해외네트워크는 엄청났다. 98년, 뉴욕 ISC쇼에 출품했다. 하니웰, 타이코그룹 등 굴지의 회사들을 곧바로 만날수 있었다. 전시회기간동안 제품데모를 하자, 이들 빅바이어들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PC기반이 아닌 셋업박스형의 스탠드얼론(STAND ALONE)스타일로 다시 개발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이유는 미국 경비원들은 대부분 중졸이하 흑인들인데,이들은 PC 마우스 더블클릭도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성능의 PC기반제품이라도 이들에겐 무용지물이라는 설명이었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게 시장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그 때 경험했죠. 아무리 첨단기능을 제공해도 시장에서 수요가 없으면 소용없다는 사실말입니다." 급히 개발, 공급했다. 이어 미 NASA,유니버설스튜디오 등은 물론 국내 고리원자력발전소 등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기관에 집중 공급했다.

이어 뉴욕지하철, 호주 시드니올림픽주경기장, 북경국제공항 등에도 공급,설치했다. 하이트론과의 성공적인 제휴덕에 미 타이코그룹과 하니웰, 유럽 지멘스 등 해외 34개국 60여개 파트너사가 아이디스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자사 브랜드가 없는 ODM공급이지만, 아이디스는 철저히 파트너쉽전략으로 해외시장공략에 나섰다.

99년부터 진출한 호주시장은 아이디스의 독무대. 2000년 시드니올림픽때 영국 DM, 미 샌소매틱사를 제치고 납품에 성공했다. 현재 호주시장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 하니웰사가 PC기반 제품도입을 결정하면서 매출은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 2000년 83억원, 2001년 161억원으로 수직상승했다. 2001년 미 9.11테러가 터지면서 DVR시장에 본격적인 활황기에 접어들었다.

2002년부터는 대형 파트너사를 통해 유럽시장공략에도 나섰다. 매출은 급증하기 시작했다. 창업 4년만인 2001년 161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코스닥상장에 성공한다.

2002년 400억원, 2003년에도 410억원으로 급증했다. 2004년에는 530억원, 2005년에는 700억원, 올해 역시 750억원에서 800억원대 매출은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이디스는 창업 10년만에 미국 칼라텔, 영국 DM사와 함께 세계 보안장비시장 '빅 3'로 등극하는데 성공한다. '메이드인코리아 DVR'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 김영달의 성공론

그만큼 아이디스는 해외에 더많이 알려져 있는 유망기술기업이다. 실제 아이디스는 뛰어난 기술력때문에 해외 파트너사에 주도권을 뺏긴 경우가 없다. 김 사장은 늘 운이 좋았다고 자평한다.

그의 필살기는 타이밍에 맞는 뛰어난 마케팅감각. 쓰리알, 성진씨앤씨 등 쟁쟁한 국내 선두기업들이 줄줄이 사라졌지만, 아이디스는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2003년이후 시장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선두권 기업들이 이전투구식 출혈경쟁을 벌일때도 아이디스는 묵묵히 자신만의 마케팅컬러를 유지, 생존할수 있었던 것.

해외시장 영업망을 구축한후 2004년 다시 내수시장을 평정한 과정도 그의 완력을 엿볼수 있는 대목. 경쟁사가 1위로 치고 올라오자, 그는 과감하게 대기업 ODM체제에서 대리점 직영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올 1/4분기에 1위 탈환에 성공했다. 대리점직영체제는 현장 고객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듣는게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의 경영스타일은 한걸음 한걸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단계별 성장론을 중시하는 '스텝바이스텝'형.

그는 회사규모가 커지면서 방향을 잡거나 판단을 하는 일이 갈수록 힘들다고 토로한다. 김 사장이 내세우는 성공론의 첫번째 화두는 '시장우선론'. 가장 좋은 기술은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이라고 단언한다.

"수백, 수천개 벤처회사의 공통점은 모든 것을 자신이 갖고있는 기술로 풀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선택과 집중. "어디에 집중해 경쟁력을 만들 것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핵심경쟁력을 확보할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그가 내세우는 것은 선장형 CEO가 돼야한다는 것. "오너는 수퍼맨형보다는 선장형이 돼야 합니다. 역할분담을 통해 자기가 결론을 내기보다는 전문가가 결론을 내도록 하는 선장형이 돼야 합니다."

그는 직원들에게 '엘리트의식'을 유난히 강조한다. 맡은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한다는것. 보이지 않는 자만심을 갖고 스스로의 내공을 쌓아야한다고 강조한다.

김 사장의 꿈은 세계 1위 보안회사로 발돋음하는 것. 이를위해 최근 IP기반 통합솔루션 VISS(Video Streaming Server)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VISS는 전국 각지에 깔려있는 3만개의 카메라를 중앙서버에서 관리·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원격모니터링시장을 겨냥한 아이디스의 차기주력제품.

DVR제조로 보안사업에 첫 발을 내딛었던 아이디스는 보안네트워크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이제는 세계 '넘버 1'의 명실상부한 토탈보안회사를 꿈꾸고 있다.

창업 10년만에 아이디스를 세계 '빅3'기업으로 발돋음시킨 김영달 사장. 그는 분명 국내 벤처기업이 가야할 방향을 모범답안처럼 제시한 성공기업가였다. 그의 세계 토탈보안서비스시장 정복기가 앞으로도 계속돼야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영달 사장은 개인적으로 친구이자 사업선배인 넥슨 김정주 사장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합니다. 사업을 즐기면서 여유있게 하는 자세나, 항상 코너에 몰리면 오판을 할수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앞을 내다보며 먼저 준비하는 자세는 자신도 흉내내기 힘든 감각이라고 평가합니다.

/김광일 객원컬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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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스,어떤 회사인가
설립일97년 9월 설립
자본금49억원
직원수180여명
사업내용PC기반 DVR,Stand Alone,시큐리티솔루션
경영목표세계 1위 보안전문기업으로 발돋음
매출목표800억원(2006년 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