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5년, '소유'서 '공유'로…런던서 K컬처 뿌리 알린다 [종합]

이건희 컬렉션 5년, '소유'서 '공유'로…런던서 K컬처 뿌리 알린다 [종합]

2021년 2만3000여점 국가 기증…전국 돌며 관람객 350만명 만나
미국 두 도시서 19만5000명 관람…해외서 한국 미술의 독자성 조명
영국박물관서 2300년 역사 한눈에…국보·보물 50점도 공개

[아이뉴스24 박지은 기자]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품의 지난 5년은 '소유(所有)'에서 '공유(共有)'로 성격이 바뀌는 과정이었다.

2021년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2만3000여점은 전국 각지에서 350만명 넘는 관람객을 만났다. 2025년 처음 해외로 나간 뒤 미국에서도 19만5000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한 수집가의 소장품이 국민이 함께 보는 문화유산으로 바뀌고, 다시 해외에서 한국의 역사와 미술을 설명하는 창구로 영역을 넓힌 것이다. 그 첫 해외 순회의 마지막 무대가 1일 영국 런던 영국박물관에서 개막한 '한국: 2000년 창의의 여정'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KH컬렉션 순회전 갈라 디너에 참석한 6·25 참전용사 마이크 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삼성]

'청자의 이병철·백자의 이건희'…수집에서 기증으로

왼쪽부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삼성전자]

2021년 '세기의 기증'은 갑자기 등장한 2만3000점의 미술품을 국가에 내놓은 사건만은 아니었다. 삼성가가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한 컬렉션의 목적과 관람 주체가 완전히 달라진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그 역사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미술 애호가였던 이 창업회장은 특히 고려청자를 아꼈다. 며느리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에게 돈을 주며 인사동에서 직접 마음에 드는 골동품을 골라오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건희 선대회장의 취향은 백자였다. 선친의 수집을 이어가면서 30대부터 백자와 목기를 모았고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청화백자의 안료 농도를 달리한 복제품을 만들어 비교할 정도로 깊이 파고들 정도로 미술사와 제작 기법을 공부한 수집가로도 알려져 있다.

국보 백자 달항아리 [사진=국가유산청]

대표적인 작품이 국보 '백자 달항아리'다. 당시 상당한 가격을 주고 사들인 작품은 훗날 국보로 지정됐다. 진위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던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를 직접 판단해 구입했다는 일화도 그의 안목을 보여주는 사례로 전해진다.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이 수집에 함께하면서 컬렉션은 고미술을 넘어 이중섭과 박수근, 김환기 등 한국 근현대미술과 해외 현대미술로 범위를 넓혔다.

수십년에 걸친 수집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은 2021년이었다. 이 선대회장 유족은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문화재와 국내외 미술품 약 2만3000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개인의 취향과 안목으로 모은 미술품이 국민 모두가 향유하는 공공 문화자산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이날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갈라 행사에서 "저희 가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예술과 문화는 보존하고 함께 나눠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350만명이 함께 본 작품…美서도 19만5000명

까치와 호랑이 © 국립중앙박물관.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기증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된 전시는 서울을 넘어 광주와 대구, 청주, 제주, 부산 등 전국으로 퍼졌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이중섭과 박수근, 김환기의 작품 등 평소 한자리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미술품들이 지역 관람객에게도 공개됐다. 2021년 이후 국내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관람한 인원은 350만명을 넘어섰다.

정선_인왕제색도 © 국립중앙박물관.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5년 11월에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열린 첫 해외 전시에는 약 8만명이 방문했다. 이어 2026년 시카고미술관 전시에는 11만5000명이 찾아 미국 두 도시에서만 총 19만5000명이 이건희 컬렉션을 관람했다.

미국 전시의 제목은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였다. 전시된 작품뿐 아니라 누가 미술품을 모았고, 유족이 왜 국가에 기증했으며, 이를 어떻게 대중과 나누게 됐는지도 전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이야기였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미술이 서구에서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 미술에 비해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번 전시가 한국 미술을 주변국 문화의 일부가 아니라 독자적이고 중요한 미술사의 목소리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美선 '나눔', 英선 '한국'…K컬처의 뿌리를 찾아

한국 2000년 창의의 여정 전시 포스터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런던에서는 전시의 질문이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수집가보다 '한국'에 가깝다.

미국 전시가 이 선대회장의 수집과 국가 기증, 미술품의 공공 향유에 무게를 뒀다면 영국 전시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 약 2300년의 한국 미술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여준다.

국보 10건 27점과 보물 13건 23점을 포함해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전시에 포함됐다. 영국박물관에서 이 정도 규모의 한국 미술 특별전이 열리는 것은 1984년 이후 42년 만이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영국에서는 더 많은 국보와 보물이 포함된 옹골찬 구성으로 새로운 한국의 이야기를 선보일 것"이라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K컬처의 뿌리를 찾아 영국과 유럽 전역의 많은 K컬처 팬들이 런던을 방문해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백자 청화 산수무늬 병 © 국립중앙박물관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실제로 이번 전시는 K팝과 영화·드라마로 한국을 알게 된 관람객의 시선을 그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로 돌린다. 인기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한 '일월오악도'와 '까치와 호랑이'를 실제 작품으로 만날 수 있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지 언론도 이 변화에 주목했다. 영국 옵저버는 "1984년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창의성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보여줄 차례"라는 시각으로 이번 전시를 바라봤다.

가디언은 한국 고미술을 두고 "놀라울 정도의 기술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며 고려청자와 달항아리,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에 주목했다. 다만 "한 컬렉션으로 2000년이 넘는 한국 미술사를 모두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취지의 평가도 내놨다.

/박지은 기자(qqji0516@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