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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크라이나의 눈물, 우리의 눈물


권태훈 사람예술학교 이사장

지난 4월14일, 폴란드에 갔다. 우여곡절이 있었다. 3월21일 인천공항 출국 중 뜻하지 않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일주일 격리 후 비로소 가게 된 것이다. 인천–뮌헨-바르샤바의 15시간 비행길, 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 제슈프를 거쳐 국경도시 프셰미실과 국경마을인 메디카의 검문소까지 가는 8시간의 자동차 길. 우크라이나 난민의 눈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절망이다. 그러나 희망을 품는다. 미얀마 난민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우리 아이들의 미소가 있기 때문이다.

맹글라바! "당신은~ 평화야." 이 신성한 언어로 이방인인 나를 평화로 물들였던 미얀마 카렌 난민 소녀의 미소. 이 난민 소녀를 위해 용돈을 아껴 미술 용품을 보냈던 우리 서우의 웃음. 이 웃음이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미소를 찾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아이에서 아이로 이어지는 미소연대로 전쟁이 평화로 바뀌지 않을까? 한 아이는 온 아이다. 온 아이는 한 아이다. 한 아이의 미래가 온 아이의 미래이듯 우크라이나, 미얀마,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하나라는 믿음에 희망을 품는다.

폴란드 남쪽 도시 크라쿠프에서 동쪽으로 256km를 달리면 우크라이나 국경 마을 메디카다. 이곳 검문소는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육로로 탈출하는 길이다. 바로 앞 한걸음만 내디뎌도 우크라이나다. 검문소 너머 순백의 구름이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진다. 하늘은 저다지도 무구(無垢)한데 바로 그 아래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있다. 전쟁이 터진 지 100일이 지났다.

양국 군인 사망자는 1만5천명이다. 미사일에는 눈이 없다. 시민 3만명이 죽었다. 시민의 무덤 위로 평화를 지킨다는 더러운 명분으로 신무기들이 세련되게 소비되고 있다. 아! 우리가 하늘처럼 못 살리 없는데 누가 이 땅에 벽을 세워 놓았을까? 지금 폴란드로 넘어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난민이 유입되는 것은 파도와 비슷하다. 전쟁 초기에 파도의 물결이 마루로 치솟아 올라가는 것처럼 몇 백만명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금은 파도가 골로 내려 앉은 추세다. 오히려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는 차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수백 미터 이상 줄지어 있다. 물어보니, 10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내가 떠날 때에도 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경도시 프셰미실은 난민들이 기차로 도착하는 곳이다. 메디카에서 14km 거리다. 난민들이 역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에서 다시 보았다. 2013년 태국 메솟의 난민촌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다. 난민은 존재의 뿌리가 뽑힌 사람들이다. 뿌리 뽑힌 존재의 불안이 삶의 불안이 된 사람들이다. 그 불안의 그림자가 그들의 눈동자에 어리어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보면서도 나의 영혼은 미얀마 아이들에게 사로 잡혔다. 어쩔 수 없다. 그들은 나의 아픈 손 가락이다. 뉴스에서 미얀마가 사라졌다.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이웃은 이렇게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크라쿠프는 폴란드 남쪽에 있는 인구 80만명의 옛 수도였던 곳이다. 서로 다른 높이로 지어진 성모 승천 교회의 두 탑이 성모의 팔처럼 광장을 지켜주고 있다. 광장 가운데 어느 시인의 동상 앞에 매일 정오가 되면 우크라이나 성모들의 호소가 울려 퍼진다.

"Please, Help Ukraine! Be People! Be Humanity!" 영어의 운율에 그녀들의 고통이 실려온다. 러시아 국가 폭력에 대항해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목소리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강한 이유는 마음이 폭력을 이길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눈물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는 듯했다.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680만명의 난민이 생겼다고 유엔난민기구(UNHCR)는 추정한다. 그 중 폴란드에 300만명이 있다. 인구 3천800만명이 이 정도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포용이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가 지리, 역사, 문화, 민족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하지만 이것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대하는 태도는 품위가 있고 난민 행정 시스템은 본 받을 만하다.

폴란드에 오면 난민들은 정성 어린 한 끼 식사 후 폴란드 전역으로 나누어진다. 내가 머물렀던 크라쿠프의 경우에는 실내 경기장인 타우로(TAURO)에 난민 행정센터를 설치하고 쇼핑몰인 아이맥스(IMAX)에 난민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난민 등록을 하면 성인 1인당 우리 돈 9만원을 한번 지급받고 아이들은 1인당 15만원을 체류하는 동안 매월 지급받는다. 난민 행정센터는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늘 천막을 마련하고 난민 임시 거처 주변에는 산책로가 있다. 폴란드에 첫 발을 내딛는 이들을 맞이하는 식탁에는 수선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다. 고향을 황망하게 떠나온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 품격을 지키게 해준다.

다른 생명을 대하는 태도로 국가의 품격을 매긴다면 폴란드는 분명 선진국이다. 국내총생산(GDP)이 선진국의 기준이라고 하는 나쁜 신화를 갈아엎어야 할 때이다. 폴란드는 유일하게 난민 300만명을 받아들인 국가이다.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문명의 밭 갈기를 하고 있다. 다음 문명의 힘을 폴란드에서 본다. 다음 문명의 품격을 폴란드에서 본다. 다른 생명을 존엄하게 대하는 문명국가의 가치를 폴란드에서 본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궁극의 질문이다. 폴란드에서 돌아온 후 한 달 넘게 이 질문에 갇혔다.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난민 시스템은 내가 경험했던 미얀마 난민보다 좋았다. 더욱이 국제 비정부기구(NGO)와 유럽 국가들의 지원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고 있다. 우리 법인인 사람예술학교도 우크라이나에 구호 성금을 보내긴 했다. 그런데 계속 고민이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데….

지속 가능한 구호 방법은 없을까? 고민을 거듭하며 우크라이나 난민, 고려인 난민, 한인회, 유학생, 국제 자원봉사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생존 조건이 해결되긴 하지만 도시에서 난민들은 고립된다. 외롭게 생활한다. 이로 인해 전쟁 트라우마와 향수병은 깊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대형 NGO에서 아동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뉴스는 보았지만 나은 방법을 찾고 싶었다. 트라우마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국어로 서로 수다를 떨면 치유되지 않을까? 향수병은 고향음식을 만들어 서로 나누어 먹으면 치유되지 않을까? 아이들의 트라우마는 아이들끼리 서로 어울려 놀면 치유되지 않을까? 한국의 사랑방 같은 난민 커뮤니티 센터를 설립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온통 전쟁이다.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이번엔 우크라이나. 현재 전쟁 중인 곳이 여기만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시리아, 남수단, 이라크, 예멘, 아르메니아, 리비아, 소말리아, 차드. 셀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키는 놈은 누구이고 죽어 나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왜, 아버지들은 맥없이 사라지고 아이들은 울고 있는 것일까? 누가 이 잔인한 수레바퀴를 교묘하게 맞잡아 돌리는 것일까? 우리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긴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래요, 역사가 증명해요"라고 말하면 우리의 책임은 다하는 것일까? 우리 양심의 눈물이 우리를 평화의 군대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 눈물이다. 눈물만이 전쟁을 이길 수 있다. 이 눈물에 어떤 군대로 응답해야 할까? 우리 군대는 눈물 흘리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질문하는 군대이다. 우리 군대는 후방에서 진지만 구축하는 군대가 아니라 피 흘리는 이웃을 위해 적진의 심장으로 목숨 걸고 돌진하는 군대이다. 우리 군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에서 평화를 실현하는 군대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위해 지금 눈물 짓지 않는다면, 우리를 위해 눈물 흘려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을.

/권태훈 사람예술학교 이사장

권태훈 사람예술학교 이사장 [사진=사람예술학교 ]
권태훈 사람예술학교 이사장 [사진=사람예술학교 ]

권태훈 사람예술학교 이사장은 2013년부터 미얀마 난민촌 아이들을 위해 사단법인 사람예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예술을 통해 미얀마의 민족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기 위한 난민 커뮤니티 '피스 코뮤니타스'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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